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탠퍼드 대학교 (문단 편집) == 역사 == 187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릴런드 스탠퍼드는 란초 샌프란시스코(Rancho San Francisco) 지역의 650에이커의 토지를 매입하여 이곳에 팔로 알토 (Palo Alto) [[말(동물)|말]] 목장을 설립하였으며, 곧이어 인근에 있는 부지를 더 매입하여 총 8,180 에이커(환산하면 정확히 1,013만 평. 참고로 [[서울대]]는 120만 평)의 거대한 말 목장을 운영하였는데, 훗날 이 거대한 목장이 오늘날의 스탠퍼드 대학교의 캠퍼스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스탠퍼드는 '목장(The Farm)'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원래는 현재 스탠퍼드 대학 바로 옆에 있던 메이필드(Mayfield)라는 작은 타운에 학교를 지을까 했지만, [[술]]을 금지해 달라는 스탠퍼드의 요청을 메이필드 시장이 거부하자 그 옆에 [[팔로 알토]]라는 마을을 새로 만들고 거기에 학교를 지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메이필드 시는 경제난 때문에 팔로 알토 시에 자진 합병되었다. 그래서 지금 팔로 알토에는 두 개의 다운타운(University avenue - 팔로 알토, California avenue - 메이필드)이 있다고. 참고로 California avenue보다 더 남쪽의 구 메이필드 지역(정확히는 Oregon expressway보다 남쪽)은 1970년대까지 범죄율이 높던 동네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팔로 알토가 하나되어 엄청난 부자 동네가 되었다. 릴런드 스탠퍼드의 외아들인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는 1884년 16세가 되기 전에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릴런드 스탠퍼드는 그의 부인에게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을 모두 우리의 자녀 삼읍시다."라고 말하며 6년간의 준비 작업과 토목공사를 거쳐 1891년 10월 1일 스탠퍼드 대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이 때 학교 건축과 조경 계획을 맡은 인물이 [[뉴욕]] 시의 [[센트럴 파크]]를 설계한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 L. Olmsted)이다. 개교일 이른 아침부터 채 마무리를 짓지 못한 공사 인부들은 개막식장 연단 건축 작업에 분주했으며, 그 뒤에는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의 실물 동상이 서 있었다. 물론 워낙 오래된 이야기라 동상이 현존하지는 않는다. 개교시 559명의 학생들과 15명의 교수진을 맞이하였다. 2018년 가을 현재 7,083명의 학부생, 8,021명의 대학원생과 2,240명의 교수진이 활동하고 있다. 사립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초갑부 설립자가 통크게 거금을 썼기 때문에 1920년까지 아예 [[등록금]]을 받지 않았다. 흠좀무. 2023-24년도 등록금 및 생활비 총액은 $84,000이지만 부모의 연간 소득이 $150,000 이하일 경우에는 '''등록금 전액 면제''', 그리고 $100,000 이하일 경우는 '''등록금 및 생활비 전액 면제''' 혜택을 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스탠포드나 하버드 대신 비용이 저렴한 학교를 다녔다는 일부 유명인들 이야기는 이 학교들에 입학이 불허되었다는걸 전제로 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2023-24년도 스탠포드 연간 예산은 미화 89억불, 한화로 11조원을 상회한다. 입학만 할수 있다면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도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 설립 후 릴런드 스탠퍼드의 죽음과 1906년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캠퍼스가 심하게 파괴되어 대단히 큰 위기를 겪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당시 학장이던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Emmons Terman)이 스탠퍼드 부근 지역 산업 발전을 위해 이끈 [[기업가정신]](entrepreneurialism)[*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에 기반한 창업과 기업가 정신을 통틀어 일컫는다.] 캠페인에 의해 [[실리콘 밸리]]의 기반을 설립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편 터먼 교수는 한국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인물로 1960년대 말 미국 국제개발처 (USAID)의 요청에 따라 한국을 방문하여 훗날 한국 과학기술인재의 요람으로 발전하는 KAIST 설립에 필요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적극 협력했으며 마침내 1971년 2월 KAIST 개교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archives.kaist.ac.kr/eng/history.do#] 1891년 스탠퍼드 개교 당시 학교 근처는 과수원 농장뿐인 깡촌이었지만[* 사실 이 지역은 좋은 날씨와 토양 덕분에 과수원으로 적지 않은 소득을 올리던 동네였다.] 2차 대전 종전후 비약적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앞서 언급한 공대 학장 프레더릭 터먼 교수(1900년 출생)로 스탠퍼드 학사, 석사, MIT 박사 (1924년 박사학위취득) 출신인 터먼 교수는 1925년부터 1941년까지 스탠퍼드 공대 교수로 재직했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하버드 대학교]]에서 거대한 전파 기술 연구팀을 이끌다 종전 후 스탠퍼드 대학의 공대 학장으로 돌아왔다.[* 터먼 교수의 아버지 Lewis Terman 도 스탠퍼드 교수였다] 터먼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방부 인맥을 통해 막대한 연구비를 끌어온 동시에 '''"졸업생 너희들이 회사를 세워라! 학교가 도와줄 거다!"'''를 강조하면서 [[실리콘밸리|시대를 앞선 벤처 붐]]을 이끌었다. 이후 학교 옆에 [[인텔]](1968년 고든 무어 Gordon Moore, 로버트 노이스 Robert Noyce 설립)과 [[AMD]](1969년 제리 샌더스 Jerry Sanders 설립)의 모태가 되는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가 1957년 설립(앞에 언급된 3인은 모두 페어차일드 출신)되었고, 학교 주변으로 [[실리콘 밸리]]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제 전설로 남은 [[Apple]]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회사 설립 초기인 1976년 무렵 사용하던 사무실 (770 Welch Road, Palo Alto, CA 94304) 역시 스탠퍼드 캠퍼스 부지 내에 위치하고 현존해 있다.[* computerhistory.org/revolution/personal-computers/17/300/1051] 실리콘의 시대에 이어 [[구글]]로 대표되는 인터넷의 시대가 오면서 연이은 초대박에 대학의 위상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성공한 동문들의 기부금과 학생들이 재학하는 동안 설립한 회사의 학교 소유 지분으로 들어오는 돈이 엄청나다. 요새는 학문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다른 대학에 밀리는 감이 있으면 돈으로 해결하는 중이다. 예를 들어 2000년까지 미국 10위 정도였던 의대를 물량 공세의 힘으로 2013년 2위까지 끌어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